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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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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노랑 병아리들이 여럿 부화된 꿈을 꾸었다. 우리 집엔 노랑 병아리가 나올 확률이 없는데 말이다. 친정엄마께 옥수수를 가져다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태몽을 꾼 것인가 보다! 며느리의 출퇴근 길이 너무 멀어서 며느리의 직장가까이에 집을 구하면 그 때 쯤 아이를 낳을 계획을 하는 줄 알았다. 나는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천천히 낳아도 상관없었기에 아들부부가 아이를 낳고 싶을 때가 되면 낳겠지 싶었는데 지난 봄에 아들이 아이를 갖기 어려운 상황임을 이야기했었다. 딸아이가 요즘 젊은 사람들이 난임이 많다하기에 아들부부도 그렇겠거니 싶어 며느리에게 너무 상심하지 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리라고 다독거려주었던 게 3개월 전이다. 아직은 조심스러워서 주변에 알리지 않고..
단순기억상실? 가끔씩 순간적으로 기억을 잃는 경우가 생긴다. 며칠 전엔 손아래 동서의 친정어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고 급히 일산에 다녀왔다. 반쪽 퇴근 후 KTX를 타고 올라갔다가 마지막 KTX로 돌아와야해서 동선을 잘 정리해야했다. 서울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탔는데 그만 내려야 할 역을 착각해버렸다. 당연히 내릴 곳에 내렸다 생각하고는 출구를 찾는데 우리가 나갈 8번 출구가 아예 안보인다. 지도를 살펴보고 8번 출구 근처의 2번 출구로 나가봤는데 사방이 암흑이다. '아뿔사!' 한 정거장 더 갔어야 했다는 걸 그제야 인지했다. 다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지하철요금 다시 한 번 내고 한 정거장을 가는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 시간이 20분 지체되었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그리했을까 정말 바보같은 기억력을 탓했다. 그런데..
60년을 살아온 나의 반쪽 반쪽의 환갑이다. 물론 요즘 시대에 환갑이 무슨 의미냐겠지만 어머님께서 서운해하실까 조촐한 파티를 준비했다. 이 뜨거운 여름에 밭에서 일하다 반쪽을 낳느라 고생하신 어머님 생각해서... 만 60년 인생을 살아온 반쪽의 생일을 맞아 그 세월의 반이상을 부부로 함께 살아온 우리가 앞으로 또 그만큼 살아갈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함께 잘 늙어가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반쪽이 평일에 쉬고 주말엔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반쪽의 출근 이후 아들딸과 파티 준비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갑자기 파티하기로 한 날, 반쪽이 출근을 안한다는 것이다. 깜짝파티를 계획한 건데 ㅜㅜ 고민 끝에 딸이 먼저 내려와 아파트에서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 사이 아들과 며느리는 시골집에 파티장을 꾸미기로 했다. 축하현수막과 ..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2) 요즘 마을공동체 일로 바쁘게 지내다보니 글쓰는게 게을러졌다. 글을 쓴다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닌 것을 ... 머리카락 염색을 안한 지 4개월 지났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주로 이마에 몰려있다. 유전적인 영향인 지 아니면 정상적인 상황인 지 모르겠지만 앞 쪽이 주로 하얗게 물들었다. 굳이 멋드러진 표현을 하면 은발이 늘어간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딸아이는 삭발을 하면 어떻게 권유하기도 한다 ㅎ 사실 머리카락이 짧으면 하얀 머리가 덜 보일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긴 머리카락을 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짧게 자를 용기가 안난다. 어떤 이는 나이들어 보인다며 머리카락 염색하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흰머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굳이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나의 스물 다섯, 스물 하나 지난 주말에 우연히 불후의 명곡 프로그램에서 듣게 된 자우림의 노래들. 반가웠다. 예전엔 노래가사를 집중해서 듣지 않았는데 요즘은 귀에 꽂히는 가사들이 있다. 자우림의 '스물 다섯, 스물 하나'를 윤하가 부르는 장면을 보면서 왜 그리 가슴뭉클하던지 그 이후 가사를 되새기는 중인데 https://youtu.be/XTsdPeUKlZg 반쪽이 즐겨보는 아침방송 '인간극장'에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또다시 듣게 되었다. 나의 스물다섯, 스물하나. 지금 MZ세대들에 비하면 행복한 시기였을까?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대를 살면서 나역시 무척 암울했던 나이가 아니었나 싶다. 그 당시 정책적 꼼수(?)에 의해 나의 꿈은 강제로 빼앗겨졌고 오로지 단 하나의 꿈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던 나는 실패한 정책의 희생양이 되어 살고..
음치가족 어려서 노래를 꽤 했던 기억이다. 중학교 때는 노래 잘 부른다고 학교선생님들이 예뻐해주셨던 탓에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선생님들께 잘 보이고 싶어서 노래를 잘 했던 것은 아닌데 사춘기 친구들 눈에 가시였었던 것 같다. 대학생활하면서는 국악기를 다루는 동아리활동을 했었고 MT를 갈 때마다 버스 안에서(지금은 금지되었지만) 민요를 자주 불렀었다. 민요를 부른다고 지도교수가 동기들을 불러 나와 어울리지 말라고 했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그 시절엔 우리 음악을 하는 경우에 대해서 좌파처럼 여기는 시선이 많았다. 지금도 교육부에서 새로운 교육과정에 음악교과서의 국악비중을 제시하지 않으려 한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음악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에 비해 우리 스스로의 자부심은 여전히 낮아보인다. 그렇게 노래를..
가정의 달 부모님의 사랑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어버이날! 아들딸의 어버이로, 부모님의 아들딸로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를 축하하고 싶다. 어머니날을 기념해오다가 1973년부터 어버이날로 불리워졌다는데 나의 어린시절, 그 당시엔 '어머니은혜' 노래를 불러드렸지만 가사에 어머니만 쓰여있어서 아버지에 관련된 노래를 찾다가 '꽃밭에서'의 가사에 '아빠'라는 호칭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께는 '어머니은혜', 아버지께는 '꽃밭에서'를 따로 불러드렸던 기억이다. 5남매가 부모님앞에서 재롱떨던 시절이야기다. 그 땐, 나의 부모님만 생각했을 뿐 나의 부모님의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사실 우리 부부는 기념일에 대해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편이라 어버이날에 대해서도 아들딸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진 않는다. 가..
치명적인 나의 단점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어떤 모임자리에 나가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부추겨 중책을 떠맡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하지않겠다는 일들에 대해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야하는데 결국 의견 한마디 제시하면 나의 일로 돌아온다. 사실 일을 잘하는 건 아닌데 어려운 상황에서 일을 주도해달라는 요청을 들으면 거절을 못하는게 나의 단점이다. 그렇게 해서 어떤 중책을 맡게 되면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내가 권력욕이 있다는 험담이다. 혁신학교를 주도할 때도 그랬고 명퇴직전에 교육과정부장을 맡았을 때도 그랬다. 오래 전 전교조 지회장을 맡았던 이유도 아무도 하지 않겠다해서 지회의 존립을 위해 나섰던 것 뿐이었다. 이해타산적이지 못해서 뒤통수를 맞는 일이 간혹 있기도 하지만 공동체활동을 위한 자리에서만큼은 부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