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284)
마을살리기 교육과정 2년 전, 학교가 있는 마을에 환경을 위협하는 공사장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시위를 하게 되었고 학교 측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 교장이 도움요청을 거절했다. 학교는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아니 마을에 공사장이 들어서면 학생들에게도 영향이 미칠텐데 그런 상황에서 중립이라니... 십년넘게 이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찜찜했던 것이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십년 근무하면 떠날 지역인데 관심가져서 뭘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떠돌아야하는 것을 당연시 생각했던 예전엔 미처 심각하게 고민을 못했던 것이다. 학부모들이 주거지를 물을 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이 곳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세금은 다른 곳에 내는 현실에 대해서도 미안했고 아이들과 ..
하늘학교로 떠난 후배교사 갑작스럽게 페북 타임라인에 작년에 하늘로 가버린 후배관련 글이 떴다.후배의 제자가 올린 글이었다. 후배의 페이스북에 찾아들어갔더니 고인이 된 지 이미 일년이 되었건만 제자아이들이 못 잊고 글을 남겨두었다. '군대전역했다, 광복70주년 영상만들었다, 생신축하드린다' 등 다양한 글들이 도배되어있었다. 아무 대답도 없는데. . . 대학시절 과후배로 만났을 땐 마치 산적같은 험악한(?)인상이었으나 이야기나눌수록 따뜻한 후배였다. 미발령으로 인해 집회나 시위를 다닐때면 위험하다며 앞에서 먼저 나서던 후배였다. 충남에 올라와서 전교조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유난히 반겨주던 정감있는 후배였다. 발령 못 받고 고생고생하다가 늦깍이교사로 교단에 선 지 불과 7,8년만에 암을 발견했고 3년정도 투병생활 하면서도 늘 웃고 장난..
하릴없이 끄적거림 어릴 때 나는 사내아이들처럼 놀았다. 약했던 체력에 비하면 모순으로 들리겠지만 경찰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사내아이들과 골목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잦은 전학으로 인해 친구사귀는 법을 잃었다. 오죽하면 일기장에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다고 썼었을까. 중학교 1학년 때, 전학을 와서 학교폭력을 당했다. 그당시 키가 가장 작았던 나는 친구들의 폭력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물론 부모님께 말씀드려도 되었겠지만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참고 견뎠다. 시간이 해결해줄 때까지... 교사가 꿈이었으나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해져서 더듬더듬 헤맨다. 앞에서 발표를 할 땐 글자가 안보이고 노래를 할 땐 가사를 빠뜨리고 무용을 할 땐 흐느적흐느적 그랬다. 도..
엄친아 엄친아가 유행어로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아마 가수 이승기씨가 엄친아의 대명사처럼 불리기도 했던 듯한데... 지인의 아들이 수능준비를 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엄친아보다는 아들 친구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단순히 아들 친구의 엄마이기보다는 대학선배이기도 하다. 선배는 엘리트집안에서 성장했고 배우자역시 대기업임원이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 유치원부터 유명한 사립유치원에 보냈고 학창시절 시교육감상과 시장상을 휩쓸만큼 재능있고 똑똑하게 가르쳤던 것 같다. 아들이 중학교 입학하면서 우연히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친구가 되었고 같은 고등학교를 배정받으면서 양 쪽 가족끼리도 서로 교류하며 친하게 지냈다. 수능을 치르고 나서 아들은 고민하지 않고 원하던 전공에 따라 수시지원한 대학을 선택했으나 아들의 친구..
작은 학교, 농촌 풍경이 좋다. 1999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다가 대통령께 편지를 썼다. 물론 그 이전 대통령들에게도 편지를 썼기는 하다. 교원정년을 단축했던 탓에 초등교사의 부족현상이 발생하면서 농어촌지역의 초등교사 대란현상이 기사화된 것이다. 젊은 초등교사들이 도시를 선호하게 되어 임용고시에 합격해놓고 농어촌지역으로 발령나면 학교를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둘째아이까지 다 키워놓고 뭔가 일거리를 찾던 나는 그 기사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는 대통령께 편지를 썼다. 나처럼 발령대기 중에 임용고시제도가 생기면서 교사의 꿈이 좌절되었던 중등자격증 소지자에게 기회를 달라고... 물론 그 답변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대통령들에게 억을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면 항상 답변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발령대기 3년의..
미안해. 아들, 딸! 헬리콥터맘도, 잔디깍기맘도 아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제발 우리 아들좀.." 캥거루 엄마에 시달리는 인사담당자들.. http://media.daum.net/v/20150930110109008?f=m 자식을 위해 저렇게까지 나서야하는 엄마들 마음이야 오죽하겠냐마는 아무리 들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렀어야 하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지적도 해본다. 2008년에 일교조와의 친선으로 일본에 갔을 때만해도 88만원세대로 불리우는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의 현실을 개탄했었다. 당시 함께 갔던 두 명의 대학생들이 일교조와의 세미나에서 88만원세대로서의 아픔과 괴로움을 토로했던 적이 있다. 그래도 좀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가져보자고 위로를 했었다. 나아질 기미조차 안 보인다. 취준생..
명절 이야기 하나 어렸을 때 명절은 집안 어른들 만나서 용돈벌고 할아버지 묘에 성묘가고 그저 그랬다. 아버지께선 가난한 집의 외동이셨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서 제사지내는 것이나 성묘에 그다지 찬성하진 않았지만 할아버지 묘에 인사드리러 가는 정도는 허용하셨다. 모태신앙이었던 나 역시 제사상에 절하는 것과 무덤에 절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제사를 부정하게된 것도 사실 기독교의 영향이기도 하여 결혼을 하면서 친정에서는 친정의 문화를 따르고 시댁에서는 시댁의 문화를 따르기로 했다. 결혼식을 올릴 때,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이 나의 의견을 들어 교회에서 결혼식을 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이해를 해가면서 살아야하지 않겠나!친정어머님의 완강한 주장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에 가야하는 남편의 고..
고교평준화에 대한 상향, 하향논란 중요하니까 논란이 이는거겠지만 경험을 통해 느끼는 건 그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다는 것. 대전에서 처음 고교평준화를 실시하던해, 이종사촌오빠가 평준화실시전 꼴찌라고 놀림받던 고교에 배정받고 집안이 모두 초상집분위기였던 기억이 난다. 친한 친구는 당시 명문으로 불리우던 고교에 당첨(?)되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주 잘살고 있다. 꼴찌로 불리우던 그 고교는 지금은 손꼽히는 명문 중에 하나가 되었고. . . 물론 명문의 기준이 sky합격률이고 보면 과연 명문이라는 표현이 맞는건지는 모르겠다. 아들도, 딸도 평준화고교를 다녔다. 아들이 신설고에 배정받은 당시 자퇴생이 많았다. 아들친구 역시 원하지않았으나 부모에 의해서 자퇴를 하고말았다. 그 아이의 눈물이 기억난다.대입진학의 노하우가 없는 신설이라는 이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