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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길 닿는대로

동유럽여행 3일째ㅡ프라하의 매력

오전 2시. 시차적응을 못한 때문인지 이시각만 되면 저절로 잠이 깬다. 아침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 . 아들말로는 일찍 자서 그렇다는데 원래 난 방학 중엔 많이 자는 편이라 일찍 자든 늦게 자든 상관이 없다.

오후 다섯시정도는 이미 어둑어둑해지니 야경보고 숙소에 들어오면 오후 8시정도. 그나마 와이파이 잘 되는 호텔에선 sns로 소식을 듣지만 지인들에게 소식전하긴 어려운 시각이다.

오전 2시부터 잠이 깨서 목욕재개(?)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지인들과 문자를 주고받는다. 유럽에 오니 와이파이쓰기가 참 힘들다. 식당같은 곳에서는 와이파이서비스가 괜찮은 편이나 그렇지 않고는 인터넷사용이 불편하다. 특히나 한글검색은 더 어렵다.  블로그 하나 올리려고 해도 사진파일때문에 몇 시간씩 걸린다. 여행기록을 그때그때 해두고 싶어서 쓰긴 하는데 ...

오전 7시반 호텔조식을 먹었다. 가장 좋아하는 야채와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ㅎㅎ

날씨가 맑아진 듯하다. 어젯밤에 보았던 카를교부터 보기시작하여 프라하성과 페트르진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화약탑을 보고 현지식으로 저녁 먹는  일정을 짰다.

 

1992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는 프라하성으로 가는 카를교에는 양쪽에 조각상들이 늘어서있는데 각각 시간을 달리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카를교 중간쯤에 카를4세의 아들 바츨라프4세가 자신의 왕비가 바람 핀 사실을 고해성사로 들은 신부 얀 네포무츠키에게서 증언을 들으려다 실패하자 네포무츠키를 강에 던졌다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 있다. 그 후 좋지않은 일이 계속되다가 어느 날 블타바 강위에 다섯개의 별이 뜨고 그 자리에 얀 네포무츠키의 시신이 떠올라 그 유해를 성 비투스성당에 안치하자 나라의 좋치않았던 일들이 사라졌다는 성 얀 네포무츠키의 순교 이야기가 흥미롭다.
카를교아래 흐르는 강은 블타바강이라 부르는데 독일의 엘베강과 만난다고 한다.

겨울이라 운영하지않는 레서타운브리지타워를 지나

성 니콜라스 교회를 돌아 옛날 왕의길이라 불리웠고 귀족들이 살았다는 네루도바거리를 지나서 프라하성으로 올라간다. 네루도바 거리에 상점들이 이제 막 문을 열고 있었다.

네루도바 거리의 어느집 창문옆에 두 개의 조각상을 한 컷. 귀족들이 살던 곳이라 가문의 문장으로 집주소를 대신했다는데 체코의 작가이자 시인인 얀 네루도바가 살았던 곳이라 거리이름이 네루도바란다.


드디어 도착한 프라하 성. 근처 학교에서 현장학습 왔나보다. 초등학생들이 단체로 눈에 띤다.

흐라드챠니광장에서 근위병이 서있는 문을 지나 미션 임파서블을 찍었다는 제1정원을 거쳐 처음 만나는 거대한 성당. 성 비투스의 성해를 모시고 있다는 성 비투스 성당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성당에 성인의 시신 일부를 성해라 하여 성당에 모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는군. 

프라하성 투어에 성인기준 250코룬(한화 12000원). ATM에서 현금뽑았는데 불량지폐가 한장있었다. 그것도 200코룬짜리. 입장료내느라 꺼냈다가 직원이 불량지폐라고해서 알게 되었지만 ATM기에서 나온 걸 어쩌랴! 자세히 보니 찢어진 지폐를 붙였는데 일부분이 찢겨져나갔다. 어허 참.

성 비투스 대성당이 있고 오른쪽에 구프라하성이 있다. 이 성을 지을 때 왕에게 특별한 능력을 가진 딸이 셋있었는데 그 중 셋째딸이 예지력을 가지고 있어 농부의 허름한 집을 사들여 여기에 성을 짓고 도읍을 정하기기로 했단다. 그리고는 그 농부와 왕의 셋째딸이 결혼했고 그래서 성 바울 성당 뒷편에 농부와 셋째딸의 조각상이 있단다.(이건 떠도는 이야기) 여기서 떠오르는 아라비안 나이트 동화한편이 있었다.

로마네스크양식과 고딕양식을 보이는 성비투스성당은 제작기간만 대략 천년걸렸다는군. 성 네포무츠키의 유해가 안치되어있고 알퐁스 무하의 스테인드글라스작품이 있다. 또한 특이하게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랫쪽에 기증한 회사의 상표나 광고성 문구들이 있었다. 체코에선 이런 것들도 허용했었나보다. 외부에는 빗물이 흘러내리게 만든 가고일들이 험상궂은 형상으로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성당인데 어찌보면 미신적인 요소인 듯 보였다.

성 비투스 성당을 짓게 된 것은 체코에서 수호 성인으로 받드는 성 바츨라프 왕에 의한 것이란다. 925년 체코의 기독교화를 가져온 왕이라는데 그 때문에 이교도인 어머니가 동생을 시켜 바츨라프 왕을 살해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귀하고 선량한 자라는 의미의 바츨라프. 이 성 바츨라프를 기리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의 이름이 붙여졌다는군. 해마다 9월 26일에 바츨라프의 날을 기념하며 사제는 바츨라프 왕의 유골을 꺼내 왕관을 씌워주는 의식을 한다는데 바츨라프 왕의 유골과 왕관은 체코의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한다.

성당 건축기간, 스테인드글라스의 규모, 성당 외벽에 작은 돌멩이 수십만개를 모아 만든 벽화 등을 보며 한 편으론 씁쓸함이...

 


아래의 구프라하성은 원래 목조로 지어졌던 것을 새로 건설했다는데 보다시피 연회장이 텅비어있어 씁쓸. 한쪽 구석엔 벽난로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번째는 성 이르지성당. 바츨라프 왕이 자신을 키워주고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할머니 루드밀라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10세기부터 14세기까지의 건축양식이 이르지 성당 곳곳에 혼재되어있어 자체로도 건축박물관인 셈이다.

마지막 황금소로라 불리우는 주거지. 성에서 일하던 하인과 병사들이 살았다는데 난쟁이 집처럼 아담한 규모들이 나란히 붙어있다. 연금술사와 금세공인들이 살았다해서 황금소로라 불렀다는데 네루도바거리의 집들과 완전 대조적이다. 이 좁은 공간에서 잠자고 일하며 지냈을 사람들의 불편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왕과 귀족의 삶은 풍요롭지만 하층민들의 애환은 여전하다는 생각에 금수저계급론이 떠오른다.

프라하성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으스스한 기운이 엄습해오는 곳이었다. 1496년에 지어진 달리보르탑이란다. 달리보르는 영주를 보좌하던 의로운 기사의 이름인데 영주의 폭정을 피해 나온 농민을 받아주고 농민 봉기를 돕다가 반역혐의로 이 지하감옥에 갇혔고 이 곳에서 처형된 후 이 탑의 이름이 달리보르 탑으로 불리우게 되었단다. 육중한 문과 고문기구들이 그 당시 고통을 전해주는 듯

프라하 성에서 내려와 숙소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아들딸이 페트르진 언덕에 프라하전경을 볼 수 있는 65m높이의 전망대가 있다고 어두워지기전에 가자고 서둘려댔다. 높은 곳을 싫어하는 나는 안가고싶다고 투덜거리며 따라가야했다. 아침에 보지 못했던 길거리 예술가들이 카를교 다리 위에서 여러 가지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다. 

원래 관광객을 위해 푸니쿨라라는 게 운행되는데 겨울이라 안한다. 겨울이라 볼 수 없는게 많다. 아쉽지만 사람이 덜 북적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 . 무튼  페트르진 언덕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 만들어져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데 기진맥진한 나를 앞에서는 딸이 이끌고 뒤에서 아들이 밀고ㅜㅜ
그렇게 올라간 페트르진 언덕에서 바라본 전망대계단.  파리의 에펠탑처럼 만들어진 그 계단, 으악! 아들딸에게 도저히 못가겠다며 엄살부려서 결국 전망대올라가는 비용 120크룬의 절반값으로 커피한잔 마시며 두어시간 책을 읽었다.

오후 6시, 페트르진전망대를 보고온 아들딸이 호들갑스럽게 약올린다. 그 멋진 프라하야경을 못봤다고. . .그런거 난 안봐도 괜찮은데. .

 

내려오는 길에 멀리 프라하성이 보였다. 카를교를 건너며 성 얀 네포무츠키의 조각상과 바츨라프 4세의 명으로 네포무츠키를 물에 던졌다는 장소를 사진에 담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부분은 던져지는 네포무츠키를 관광객들이 만져서 그렇단다. 만지면 프라하를 또오게 한다나 뭐라나. . 난 또 오지않아도 되니까 그냥 패스.
체코현지식 중에 한국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꼴레뇨먹으러 화약탑근처에 갔다. 중세부터 화약을 보관하게 되면서 화약탑이라 이름 붙여졌다네.

요길 통과해서 찾아간 식당

 

체코의 맥주인 필스너 우르켈과 꼴레뇨. 꼴레뇨는 돼지정강이를 삶은 요리라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족발같다고 좋아한단다. 체코사람들이 한국인은 와서 왜 꼴레뇨를 찾는지 신기해했다고. . .
하나를 사서 셋이 먹는데 프라하관광하느라 다리가 후덜덜한 상황에서 꼴레뇨썰어대느라 팔도 후덜덜ㅎㅎ


아들과 교대로 살발라내며 겨우 먹었다. 필스너 우르켈은 부드러운 거품과 함께 목넘김이 시원했으나 꼴레뇨는 와사비비슷한 소스에 찍어먹는 맛이 그냥 그냥 그렇다. 우리가족 입맛엔 별로인 듯. 체코전통식 중 가장 비싸다. 꼴레뇨 279코룬이니까 우리돈 만사천원정도와 맥주 0.5리터에 45코룬이니까 우리돈 2200원정도.

과거 오랜 종교전쟁을 겪었고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었으며 공산주의 혁명으로 소련의 위성국인 체코슬로바키아였다가 지난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평화적으로 분리하는데 성공했단다(개혁을 시도했던 둡스키는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하는 것을 반대했다지만). 

이런 역사를 간직한 프라하가 중세의 모습들을 잘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프라하를 지켜내기위해 체코인들이 고육지책으로 선택했던 항복이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에서 또 하나의 생각거리를 얻었던 하루.

칭찬 하나. 유럽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신호등없는 거리가 많은데 사람이 우선이다. 횡단보도에 서있기만해도 지나가던 차가 멈춰준다.

꾸중 하나. 공공기관 화장실이 모두 10코룬(500원) 유료로 운영된다. 야외든 실내든 화장실 앞에 지키고 서있는 직원들이 힘들겠다.

오늘 숙소에서 나가 카를교 건너 프라하 성을 구경하고 다시 숙소 돌아와 페트르진 언덕에 올라갔다가 화약탑까지 걸어갔다 돌아오는데 걸어다닌 거리는 15.33km